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문단 편집) == 유치 과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회 한국.jpg|width=7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회 일본.png|width=50%]]}}} || || {{{#fff '''한국 유치위원회 로고'''}}} || {{{#fff '''일본 유치위원회 로고'''}}} || 월드컵은 그동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번갈아 가면서 개최됐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다른 대륙에도 개최권을 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난 곳에서 월드컵을 개최할 국력과 축구에 대한 관심과 그에 걸맞는 실력이 있는 국가는 [[아시아]] 지역의 한국과 일본밖에 없었다.[* 2002 월드컵 개최지 관련 논의가 한창 뜨거웠던 [[1990년대]] 당시, 한국은 [[1988 서울 올림픽]]과 [[1993 대전 엑스포]] 개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국민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고, 경제규모 세계 11위에 OECD도 가입한 상태였다. 일본도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1991년 거품 붕괴]] 여파로 성장률이 1% 아래로 떨어지는 침체기를 맞았지만 그래도 1995년에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했으며, 여전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다. 사실 국력만 따진다면 호주도 가능했지만 당시 호주는 축구의 인기가 럭비·크리켓에 비해 많이 낮았고 월드컵 개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외에 인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는 일부 지역에 한해 인기가 높을 뿐, 국가 전체로는 크리켓·하키의 인기가 축구보다 높으며 축구 실력이 매우 떨어졌다. 중국은 천안문 사태 여파로 국제 왕따였으며 인도와 마찬가지로 축구 실력이 너무 허접했다. 중동은 축구의 인기도 높고 실력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사우디는 외국인(특히 이슬람권 이외의 외국인)이 입국하기가 까다로울 만큼 폐쇄적이었고 이란은 혁명 이후로 줄곧 반미·반서방 노선을 취한 데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은 축구보다 야구의 인기가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축구가 야구보다 더 인기가 높았고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도 야구에 밀리긴 해도 축구 인기도 제법 있었던 반면, 일본은 축구가 단 한 번도 야구보다 인기가 높았던 적이 없을 만큼 야구의 인기가 워낙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2002년 월드컵은 사실상 아시아 쪽의 한일 양국 중 한 곳에서 개최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아시아의 자존심이 되고 싶었던 한국과 아시아 최고를 외쳤던 일본 사이에 치열한 개최 경쟁이 벌어졌다. 양국의 개최 경쟁은 FIFA의 주도권을 둘러싼 유럽과 남미의 경쟁 구도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아프리카 축구계의 갈짓자 행보, FIFA 주도권과 차기 후계구도를 둘러싼 [[브라질]] 출신의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과 [[스웨덴]] 출신 레나르트 요한손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장의 대립, 전통적으로 남미의 경쟁자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자존심 경쟁 등이 맞물리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개최지 선정 투표 권한을 가진 24인의 FIFA 집행위원회는 절반으로 쪼개졌고, 전통적으로 일본과 친밀한 관계였던 브라질이 일본 쪽에 서고 축구 황제 [[펠레]]까지 내세워 공개적으로 일본을 지지하자, 경쟁자인 아르헨티나는 자동적으로 한국 편을 들면서 결국 '한국+아르헨티나+UEFA' 對 '일본+브라질+FIFA' 구도가 형성되었다. [[1989년]] 일본이 첫 월드컵 아시아 개최를 목표로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은 [[1994년]]에야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하고[* [[대한축구협회]]는 [[1988 서울 올림픽]] 폐막 직후인 1989년 정부에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제안했으나, 1993 엑스포 준비에 정신이 없었던 시점이라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95년]]에 일본과 함께 [[FIFA 월드컵]] 개최 제안서를 제출한다. 제안서를 제출한 국가가 두 나라밖에 없었으므로 유치 경쟁은 굉장히 치열해졌다. [[브라질]]이 오랜 우방[*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브라질에는 상당한 규모의 일본계 이민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현재도 일본과 브라질의 교류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활발한 편이다.]인 일본이 개최하기를 원하자 아르헨티나는 그저 브라질이 일본 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한국 편을 들었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를 내세워 2002년 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1995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보카 주니어스]] 초청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에 출전시켰다. 그 경기는 마라도나가 [[1994년 미국 월드컵]], 약물 복용으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 첫 번째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때 [[김영삼]]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이 시축을 하고, 마라도나, 그리고 당시 방한한 [[카를로스 메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기념 촬영을 하였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한국의 [[허정무]]에게 맞은 게 있고 이걸 끝까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외의 행보였다. 펠레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출신인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 역시 일본의 단독 개최를 지지하였다. 당시 아벨란제 회장은 아예 한국은 [[6·25 전쟁|전쟁]] 위기가 있으니 일본이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매해 휴가를 일본에서 보낸다고 자랑하는 등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우세가 기정 사실이었지만, 월드컵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 나라는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부족하다[* 실제로 일본은 199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첫 본선 진출을 거의 다 이룬 상황에서 [[도하의 기적|이라크에 발목을 잡히고 94월드컵 24개국 본선 티켓을 한국으로 내주면서 아시아 3위로 탈락했다.]] 그리고 다음 대회인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때 32개국 본선으로 확대되어서야 첫 진출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때도 지역 예선에서 [[도쿄 대첩|홈에서 한국에게 역전패당하는]] 등 고전한 끝에 조 2위로 떨어져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각 조 2위끼리 치르는 플레이오프에서 [[조호르바루의 환희|이란과 연장 접전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98월드컵 32개국 본선 진출 티켓을 얻었다.]] 이후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된 중동의 [[카타르]]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까지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1934년 이탈리아 이후로 무려 88년 만에 월드컵 진출 경험이 없는 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카타르는 '돈으로 월드컵 진출권을 샀다'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도 32개국 중 32위라는 최하위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한 골은 넣어서 골 한번 못 넣어보고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한국의 주장이 대두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때까지 단 한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미 4차례나 본선에 진출한 경력이 있었으며(1954, 1986, 1990, 1994) 불과 2년 전에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독일 등 유럽 강호들을 상대로 상당한 선전을 펼쳤던 덕분에, '월드컵에 한 번도 못 나가본 나라는 진정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부족하다'는 한국의 주장이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도 차츰 먹히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 대세론에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와중에, FIFA 고위 관계자들이 관전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한국이 시종일관 일본을 몰아붙인 끝에 2:1로 또다시 승리를 거두어 우승컵을 들었고,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미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었다. [[브라질]]이 일본에 붙자 이런 브라질에 반대하는 [[아르헨티나]]·[[우루과이]]가 한국에 붙었고, 이에 아르헨티나와 원수지간인 [[칠레]]는 일본에 붙었으며, 칠레와 사이가 나쁜 [[페루]]·[[볼리비아]]는 칠레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에 붙었다.[* 그래도 지금은 페루와 칠레는 사이는 꽤 좋아진 편이다. 자세한 건 [[페루-칠레 관계]] 문서 참조.] 그러자 볼리비아를 싫어하는 [[파라과이]]와 페루와 적대관계인 [[에콰도르]]가 일본에 붙는 등 남미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 대한민국 지지: 아르헨티나·우루과이·페루·볼리비아 * 일본 지지: 브라질·칠레·파라과이·에콰도르 * 중립: 베네수엘라·콜롬비아 하지만 이러한 각국의 입장과는 별개로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할 투표권을 쥐고 있는 아벨란제 회장 포함 남미 집행위원 5명은 국적 상관없이 전원 일본을 지지하기로 일본 측과 약속해 두고 있었다.[* 당시 남미 집행위원들은 아벨란제 회장 포함 브라질 2,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칠레 각 1명씩 분포해 있었는데, 칠레와 에콰도르는 에초에 일본을 지지했던 데다, 아르헨티나 역시 반브라질 감정과 별개로 브라질 못지 않은 친일 국가다.] 게다가 FIFA의 개혁을 주장하던 레나르트 요한손 전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장을 필두로 유럽 측 FIFA 집행위원들이 아벨란제 회장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유럽 측 집행 위원들은 조앙 아벨란제 전 회장의 장기 집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일 공동 개최를 강력히 주장하고 여기에 그동안 부동표였던 아프리카 측 FIFA 집행위원들까지 유럽 측 FIFA 집행위원들에 동조하기 시작했으며, 열렬히 한국의 단독 개최를 주장했던 정몽준 또한 FIFA 집행위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한다면 공동 개최에 찬성한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또 한 번 급격히 반전되었다.[* 아프리카가 한국 찬성 분위기로 선회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직전에 열린 [[미국 월드컵]] 당시 미국이 아프리카 국가인 [[모로코]]를 꺾고 개최지로 선정된데다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탓에 상업성 문제를 강조하며 일본의 개최를 지지하는 아벨란제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상업성 면에서 불리한 아프리카 입장에서 이를 두고 보면 유럽, 남미는 물론 상업성에 이점이 있는 아시아나 북미에도 밀려 들러리 신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으로는 그나마 아시아에 확실히 앞서고, 북미도 멕시코를 제외하면 실력적으로 아프리카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몽준은 2006 월드컵의 아프리카 개최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유럽 상대로도 이중으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4년 후인 2010년으로 연기되었고, 이런 행보는 추후 그의 FIFA 내 행보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게다가 아벨란제의 최측근으로 확고한 일본 지지자인 기예르모 카네도 부회장이 건강 악화로 개최지 결정 투표에 불참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본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때문에 아벨란제 회장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최지 결정 이틀 전에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공동 개최 의향을 타진했는데, 사실 당시 분위기는 표 대결로 가면 일본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아벨란제 전 회장의 장기 집권에 염증이 난 유럽세가 반대 세력으로 한국을 밀고 있었고 여기에 아프리카세도 가세했으니 일본 지지 쪽은 아벨란제 회장과 남미 뿐이었는데 그 남미조차도 한국파인 아르헨티나·우루과이·페루·볼리비아와 일본파인 브라질·칠레·파라과이·에콰도르로 나뉘어 있었다.]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공동 개최를 수용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결정이었고 결국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어쩔 수 없이 공동 개최를 수용했다. 물론 한국은 이미 공동 개최를 사실상 승인한 상태였다. 결국 FIFA는 양국의 경쟁 관계를 고려하여, 한쪽이 월드컵을 개최하면 다른 한쪽은 엄청난 좌절감에 빠질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행위원 만장일치로 FIFA 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를 선언하였다.[* 후에 정몽준 전 부회장은 한국이 공동 개최라도 이룬 것은 FIFA 내부의 정치 싸움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즉, 아벨란제로 상징되는 남미파들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세계 축구 최강의 집단인 유럽세를 활용했던 것이다. 한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월드컵이 한일 공동개최로 결정되었음을 전해듣고선 "[[정몽준|몽준이]]가 하는게 다 그렇지 뭐."라며 피식 웃었다고 전해진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1980년 당시, 인지도가 떨어지던 한국이 사실상 내정된 상태였던 일본 [[나고야시|나고야]]를 꺾고 단독으로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신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물론 정주영 전 회장 본인이 가장 이뻐했던 자식이 삼남 [[정몽준]]였기에 진짜 폄하했다기 보단 애정을 담은 농담이었다.] 일본 처지에서 단독 개최 실패는 유치단의 전략 판단 실수가 부른 참극이었다. 같은 대륙에 두 후보지가 나오는 실수를 범한 피파와,[* 같은 대륙이기도 하거니와 하필이면 또 이웃나라였다. 만약에 같은 대륙이었더라도 물리적 거리가 멀었다면 이 정도의 대립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일본을 지지한 아벨란제의 삽질, 그리고 그런 아벨란제만을 믿고 유치 전략을 편 일본의 삽질 때문에 한국보다 개최 준비에 앞섰으면서도 결국 공동 개최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당시까지 월드컵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는 명분상의 약점도 일본 입장에서 치명적인 비수였다.[* 사실 일본은 1988년 올림픽에서도 삽질을 벌인 끝에 한국에게 패배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일본 역시 공동 개최라도 이룰 수 있었으니 어느 정도 성과는 달성한 셈이었다. 공동 개최안을 수용한 후, 일본은 "단독 개최에는 실패했지만 결승전이라도 우리가 치르겠다"고 주장했고 이에 한국은 추첨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실무 협의 결과, 개막식과 개막전, 본선 조 추첨식, 대회 공식 명칭 우선권을 한국이 가져가고, 지역 예선 조 추첨식, 폐막식과 결승전을 일본이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한국 역시 국민 정서상 대회 공식 명칭이 일한 월드컵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한일 월드컵이라 불리는 대신, 대회의 하이라이트인 결승전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대회 공식 명칭이 한일 월드컵(Korea/Japan 2002)로 후대에 영원히 기록되는 것을 고려하면, 결승전 대신 공식 명칭을 선점한 결정도 충분히 실리적이었다. 일본은 자국 내에서 2002년 월드컵을 '일한 월드컵' 또는 '일본 월드컵'으로 칭하며, 대회 로고를 파란색 배경에 띄워 놓아 파란색 폰트로 적힌 KOREA의 시인성을 떨어뜨리고 빨간색 폰트의 JAPAN만 돋보이게 하는 등 한국의 존재를 애써 축소하는 시도를 자주 벌이는데, 만일 공식 명칭을 일본이 선점했더라면 이런 왜곡 행태가 자국 내에서 그치지 않고 대외적으로 벌어졌을 수도 있다.] 덧붙여 본선 조 추첨식과 3·4위전은 한국에서 치르고, 지역예선 추첨식과 IBC(국제방송센터) 기술조정센터는 일본에서 하는 것으로 협의되었다. 그래도 한국 입장에서는 당시 브라질 출신인 FIFA 아벨란제 전 회장의 일본 유치론에 반대하여 한국을 지지한 여러 국가들, 그리고 정몽준 전 회장의 노력 덕분에 공동 타이틀로 한·일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정몽준은 2002년 대선 후보로 부상했다.] 그리고 2026년에 캐나다·미국·멕시코를 모두 묶은 북중미 월드컵 이전까지 유일한 공동 개회 월드컵으로 남았고 최초로 여러 국가의 공동 주관, 아시아 최초, 21세기 최초의 월드컵이라는 여러 타이틀을 얻었다. [[파일:VN19962153-00_01055005.jpg]] ---- [[1996년]] 한일 월드컵의 공동 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 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이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갔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6/nwdesk/article/2000173_30711.html|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전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60200289102005&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6-02&officeId=00028&pageNo=2&printNo=2577&publishType=00010|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 적절하게도 둘 다 사상 첫 2라운드 진출에 성공했지만,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이 16강전에서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튀르키예]]에게 져서 떨어지는 바람에 그 맞대결은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